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지리산에
들어가 3년간 오경(五經)과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1483년(성종
14) 진사시에 합격, 성균관 유생이 되고, 1490년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소격서 참봉이 되었다. 같은 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검열을 거쳐 세자시강원 설서(說書), 안음현감(安陰縣監)을
지내고, 1498년(연산 4)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종성(鍾城)에 유배,
죽은 뒤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자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었으며,
당시 성리학의 대가로서 '용학주소(庸學註疏)', '주객문답설(主客問答說)',
'진수잡저(進修雜著)'등의저서가 있었으나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부인이
모두 소각되었고, 지금은 정구(鄭逑)가 엮은 '문헌공실기(文獻公實記)'
속에
그 유집(遺集) 일부가 정구(鄭逑)의 "문헌공실기(文獻公實記)" 속에
전할 뿐이다.
중종 때 우의정에 추증, 광해군 때 문묘에
배향되고 나주(羅州)의 경현서원(景賢書院), 상주(尙州)의 도남서원(道南書院),
함양의 남계서원(藍溪書院)을 비롯하여 10여 서원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일두유집(一
遺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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