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선조 25) 무과에 급제했고,
1621년(광해 13)
만포첨사(滿浦僉使)로 국경을 수비했다. 1623년(인조1) 안주목사로
방어사를 겸임하고, 다음해 이괄의 난(李适-亂)이 일어나자 도원수 장만(張晩)의
휘하에서 진부대장(前部大將)으로 이괄의 군사를 크게 무찔러 진무공신(振武功臣) 1등이 되고
금남군(錦南君)에 봉해졌으며, 이어 평안도 병마절도사에 올라 영변 대도호부사를
겸임했다.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에 부원수를 거쳐
그 후 포도대장,
경상도 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했다.
천문, 지리, 의술, 복서 등에
능통했고 청렴하기로 명성이 높았다.
서산의 진충사에 진향되었다.
광주 경렬사(景烈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만운집(晩雲集),
금남집(錦南集), 만운일기(晩雲日記), 백사북천일록(白沙北遷日錄)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