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晋)의 아들 속리산에 있던 성운(成運)문하에서 수학하다가
1576년(선조 9) 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했으며
다음해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예조정랑 겸 지제교를 지내다가
동서 양당의 싸움을 개탄하고 명산을 찾아다니며 여생을 마쳤다.
당대의 명문장가로서 이름을 날렸고, 호방 쾌활한 시풍으로 그의
작품이 널리 애송되었다. 저서로 수성지(愁城誌), 화사(花史),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 등 3편의 한문소설을 남겼으며,
시조 3수와 '백호집(白湖集)'이 있다.
특히 평안도 도사로 부임하던
도중에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가 지은 시조가 유명하여 그 내용을
아래와 같이 소개한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엇는다 홍안(紅顔)을 어듸
두고 백골(白骨)만 무쳤는다 잔(盞) 잡아
권(勸)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 하노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