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는 고려 현종 때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낸 이허겸(許謙)이다.
김해김씨(金海 金氏)의
시조인 가락국 수로왕(首露王)의 후예로 전하며, 수로왕의 장자(長子)
계통은 김해김씨(金海 金氏)이고, 차자(次子)는 어머니 허태후(許太后)의 성을 이어받아
허씨(許氏)가 되었는데, 인천이씨(仁川李氏)는 허씨에서 갈린 분적종이다. 고려
중엽에 왕실과의 척연(戚緣)을 배경으로 크게 세력을 떨쳤는데, 그 중추적
인물은 이허겸(許謙)의 손자인 이자연(子淵)이다. 그의 딸 셋이
모두 문종의 비가 됨으로써 세력을 장악하고 문하시중을 지냈다.
그의 맏딸 인예왕후(仁睿王后)의 소생들이 순종(純宗) ·선종(宣宗)
·숙종(肅宗) 등 차례로 왕위에 올랐고, 또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도
인예왕후의 소생이다. 이자연(子淵)의 아들 이호(顥)의 딸이
순종비가 되었고, 이호(顥)의 아들 이자겸(資謙)의 딸들이 예종과 인종의 비가
되는 등 왕실과 척연을 맺음으로써 그 가문의 세력은 절정에 달하였다.
그러나 이자겸이 인종의 장인으로 권세를 전횡한 끝에
난을 일으켰다가 세 아들과 함께 숙청당함으로써 이들의 권세는 종지부를
찍었다. 대표적 인물은 고려의 학자 이인로(仁老),
조선 초의 명신 문화(文和)를 들 수 있으며, 고려조에서의 성세와는
달리 조선에서는 문과 급제자 9명을 배출하는 데 그쳤다.
또 다른 문헌에는... .
인천이씨는 태인허씨(泰仁 許氏)에서 분리되었다.
태인허씨의 후손중 신라 35대 경덕왕때 아휘찬 벼슬에 있던 허기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당나라 현종으로부터 이씨를 하사받았다. 그후 안록산의
난을 당해 4년만에 돌아 왔으나 조정에서 당에 너무 오래 머물다 돌아왔다는
이유로 작위와 식읍을 주지 않았다. 그러므로 허기의 후손 이허겸(李許謙)
까지 '이허' 복성을 사용했다. 이허겸은 두아들이 있었는데 형인 이접은
태인 허씨를 잇고 아우인 이한(翰)은 인천이씨를 이었다. 이한은 고려
때에 소성(인천)백에 봉해졌다. 그래서 성은 이씨로 이름은 허겸으로
하여 인천이씨(경원이씨 또는 인주이씨라고도 함)의 시조가 되었다.
후에 인천이씨, 허씨(許氏), 김해김씨(金海
金氏)는 같은 혈족이라며
종친회명을 '가락중앙종친회'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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