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5년(고종 2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이듬해 가주서(假注書)가
되고, 형조좌랑(刑曹佐郞)을 거쳐 1888년 세자익위오서 서연관(書筵官)이 되고, 1891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 1894년 부승지가 되었다. 이어 우승지에
올라 내의원사의원의 부제조를 겸했고, 다시 참의내무부사, 궁내부 수석함의를
역임, 1896년 사직했다. 1901년 외무교섭국장으로 등용, 이듬해
평남 관찰사로 나갔다가 1905년 한성재판소장, 법무민사국장, 고등법원
판사를 지내다가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만주로 망명하여 유하현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법무총장, 재무총장을 역임하고 1929년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가, 감찰위원장에 피선, 1933년 임시정부 국부위원 겸 법무위원이
되어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수립과 함께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대통령 이승만의 비민주적 정치노선에 반대하고
1951년 사퇴했다.
국민장으로 정릉에 안장,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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