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광무 9)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유림
300여명의 서명을 받아 매국 5적신의 참형과 조약의 파기를 상소하고
대구감옥에서 복역했다. 그 후 국채보상운동에 가담, 서상돈(徐相敦)과
모금운동을 하다가 친일파의 방해공작으로 실패했다. 1908년(융희
2)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해서 이상설(李相卨) 등과 함께 동포 자제들의
교육과 광복운동에 헌신했다. 1913년 북경을 방문, 각지를 순방하며
중국의 명사들을 만나 한국의 자주독립을 역설하다가 병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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