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1년(충렬왕 27) 성균시에 장원, 이어 문과에
급제, 1303년 권무봉선고 판관 등을 거쳐 1310년(충선왕 2) 선부산랑,
이듬해 전교시승, 삼사 판관 등을 역임, 1312년 서해도 안렴사로 나갔다가
성균악정, 풍저창사를 지냈다. 1314년(충숙왕 1) 백이정의 문하에서
정주학을 공부, 이해 원나라에 있던 충선왕이 만권당을 세워 그를 불러들이자
연경에 가서 원나라 학자 요수염(姚燧閻), 조맹부등과 함께 고전을 연구했다.
1317년 선부전서(選部典書)로 원나라에 가서 상왕의 생일을 축하했다. 1319년
충선왕을 따라 강남을 유람, 이듬해 지밀직사에 올라 단성익찬공신이
되었다. 이해 원나라에 갔다가 충선왕이 파이앤투그소의 모함으로
유배되자 그 부당함을 밝혀 1323년 풀려나게 했다. 다음해 광정대부,
밀직사사, 1325년 추성양절공신이 되고, 정당문학으로 김해군에 봉해졌다.
1336년 삼중대광 영예문관사에 오르고 심왕고의 모역사건으로 충숙왕이
잡혀가자 연경에 가서 이를 해명하고, 이듬해 귀국해서 향리에 은거하였다.
1343년(충혜왕 복위4) 원나라 사신이 왕을 잡아 가자 글을 올려 사면을
요청하고 이듬해 판삼사사에 복직, 서연관이 되었다. 1348년 충목왕이
죽자 제조 경사도감으로 원나라에 가서 충정왕의 승습을 청했고,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자 우정승, 권단정동성사로 발탁, 도첨의정승을 지냈다.
이듬해 동덕협의찬화공신에 오르고, 1353년 사직했다가
다음해 우정승에
재임, 1356년 문하시중에 올랐다. 이어 관직을 사직하고 저술과
학문에 전심하다 1362년 홍건적의 침입 때 왕을 청주로 호종,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지고 만년에 은퇴한 후 왕병으로 실록을 편찬했다.
당대의 명문장으로
외교문서에 뛰어났고 민간가요 17수를 한시 칠언절구로 번역한 '익재난고(益齋亂藁)'
소악부는 고려가요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공민왕 묘정에 배향,
경주의 구강서원, 금천의 도산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익재집(益齋集), 역옹패설(翁稗說), 효행록(孝行綠), 서정록(西征綠),
사략(史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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