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2년(고종 29) 18세로 관립영어학교(官立英語學校)를 졸업.
1894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다. 영국, 벨기에 양국 주차공사관 3등 참서관에
임명되어 영국 런던에 부임했다. 1903년 통정대부에 오르고, 이듬해
주영공사 민영돈(閔泳敦)의 귀국으로 서리공사가 되었다. 이 무렵 국내에서는
제1차 한일협약으로 국세가 위축되고, 대외적으로는 영·일 동맹으로
한국 정부의 국제적 지위가 급전직하했다. 그는 한국의 외교관을
박탈한 한, 일 의정서의 불법성을 각국들에게 호소했으나 약소국의 호소를
들어줄 나라는 하나도 없었다. 또 당시 세계최대 강국인 영국이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려는 일본의 정책에 동의한다 는 것을 탐지한 그는
이제 조국은 망했다 하고 강개했다. 그의 피나는 왜교활동과 항변은
수포로 돌아갔고 약소국 외교관의 무력, 갖은 굴욕, 절대적인 절망 앞에서
하나 밖에 택할 길이 없었다. 1905년 5월 12일 형과 부인 강씨에게
마지막 편지를 쓰고 조용히 음독 자결했다. 세칭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기 반년전 제일 먼저 목숨을 버린 당시의 그의 나이는 32세였다.
유서는 다음과 같이 절규하고 있다. ' 아! 이 날에 주권이 없으니
같은 외교관도 평등치 못하구나/ 모든 교섭에 치욕이 망 극하니 혈기있는
자 어찌 참을 수 있으랴/ 아! 나라는 장차 폐허가 되고 민족은 남의
종이 되리로다/ 구차히 산들 그 욕됨이 자심할지니 한시바삐 죽어서
잊음만 같지 못 하리라/ 이제 결심하니 따로 할 말이 없구나' 라 하였다.
고종의 특명으로 반장되어 용인에 안장되고 내부협판(內部協辦)에 추증, 장충단(奬忠壇)에
제향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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