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행(荇)의 증손으로 진사 이형(泂)의 아들이며.
재종숙부인 사헌부감찰 이필(泌)에게 입양되었다. .
18세에 진사시에
수석합격 29세 때 과거에 나아가 문과에 급제하였다. 여러 언관직(言官職)을 거쳐 예조와 이조의 정랑으로 있다가
1601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성균직강(成均直講)으로 옮겨 봉조하(奉朝賀)를 겸하였다. 공조로 옮겼다가 주시관(主試官)으로 호서와 관서에 나갔으며, 다시
예조에 들어왔다가 단천군수가 되었다. 1607년 홍주목사·동래부사를 거쳐 1610년 담양부사가 되었다.경주부윤이 되었다가 곧 호조참의 겸
승문원부제조로 임명되었다. 동부승지에서 좌부승지가 된 뒤 사직하고 강화부사가 되었다. 어머니의 3년상을
마치고, 인조반정으로 예조참판에 임명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 인조가 강화로 피란하여 공의 옜날 공적을 몸소 느껴 얼마후 다시 강화부
유수에 임명하였다. 1631년 함경도관찰사가 되었으며, 다음해 예조판서 겸 예문관제학을 거쳐 충청도도순찰사에 제수되었다. 조정에서 청렴근면한
관리를 뽑는 데 들게 되어 숭정대부(崇政大夫)의 가자(加資)를 받고, 형조판서 겸 홍문관제학에 임명되었다. 1636년 겨울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병중의 몸을 이끌고 왕을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갔다. 특히 시작에 주력하여 문집에 4,379수라는 방대한 양의 시를 남기고 있다.
두보(杜甫)의 시를 만번이나 읽었다고 하며, 시를 지을 때 일자일구도 가벼이 쓰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당시(唐詩)에 능하여 이태백(李太白)에
비유되었고 글씨도 잘 썼다.
정철(鄭澈)의 '사미인곡'을 듣고 지은 '문가 聞歌'가 특히 절창이라일컬어졌고,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 동래부사로
부임하여 지은 '동래사월십오일(東萊四月十五日)'은 사실적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국난을 형상화시킨 장편시로서, 왜적이 동래에 쳐들어왔을 때
관민이 함께 막으려다 장렬하게 전사한 사연을 담고 있다. 그의 시는 고답적 표현을 버리고 절실한 주제를 기발한 시상으로 표현한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그의 문집에 실린 시는 자신이 옮겨다닌 고장을 중심으로 묶여 있어서 그 지방의 민중생활사 및 사회사적 자료를 담고 있으며, 특히 그의
생애가 임진왜란·병자호란의 양란에 걸쳐 있으므로 국난에 피폐해진 당시의 상황을 추적하여 볼 수 있다. 또한, 명나라로 사행가면서 지은 그의
시에서는 대명교섭사(對明交涉史)의 자료를 발견할 수 있다. 숭록대부의정부좌찬성 겸 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죽은 후 청백리에 녹선되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담양의
구산서원(龜山書院)과 면천의 향사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동악집" 26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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