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0년 강릉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1464년
겸예문을 거쳐 봉교가 되었다. 1460년 설서로서 문무를 겸했으므로
선전관에 임명되었다. 다음해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공을 세워
이조정랑에 승진, 1469년(예종 1) 장령으로 춘추관 편수관이 되어 "세조실록(世祖實錄)"편찬에
참여했다. 그 후 직제학, 동부승지, 도승지를 지내고 1481년 천추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1483년 왕명으로 "오례의주(五禮儀註)"를 개정했다.
충청도 관찰사, 형조·이조의 참판을 거쳐 경주부윤, 대사성, 지중추부사
겸 대제학, 호조판서 등을 지내고, 1498년(연산 4)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좌참찬으로서
10여조에 달하는 왕의 난정을 들어 간하다가 좌천되었다. 1500년
왕명에 의해 '속국조보감(續國朝寶鑑)', '역대명감(歷代明鑑)'
등을 편찬하고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글씨도
잘 썼으며 성격이 강직하여 부정에는 끝까지 항거했다.
이조판서에
추증,
함창의 임호서원에 제향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