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 허공의 후손이며, 허손의 아들이다.
1457년(세조 3)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직장·지제고 등을 거쳐 선전 관을 역임했다. 1460년
평안도 도절제사도사가 되고, 그 후 함길도 도사, 정언, 지평 , 동부승지
등을 역임, 1465년 함길도 절도사가 되었다. 1467년 이시애가 난을
일으키 자 함길도 절도사로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적개공신1등으로
양천군에 봉해졌 다, 1469년(예종 1) 평안도 관찰사·대사헌을 지낸 뒤
이해 전라도에서 장영기(張永奇)가 난을 일으키자 전라도 절도사로
나가 이를 평정, 병조판서에 승진했다. 1471년(성종 2) 좌리공신
4등이 되고, 1477년 예조판서가 되었다가 건주위의 여진족이 침공하자
평안도 도순찰사가 되어 이를 격퇴한 후 우참찬에 이어 좌참찬에 올랐다.
1481년 호조판서를 거쳐 다음해 우찬성이 되고, 1483년 세자이사를
겸임, 이어 이조판서 등을 지내고 양천부원군에 진봉되었다. 1491년
영안도 관찰사로 있을 때 여진족이 북변을 괴롭히자 북정도원수로 2만
4천의 군사를 이끌고 적의 본거지를 소탕, 다음해 우의정에 승진했다.
궁마에 뛰어났고 문명이 높아 문무를 겸비한 명신으로 여러 차례 북변
에 파견되어 양인의 침입을 막았다. 앞서 1488년(성종 19) 에는
서거정(徐居正),
노사신(盧思愼)등과 함께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국역했으며 철저한 배불론을 주 장, 세조의 불교신봉을 반대했다.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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