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엽의 아들이다.
1594년(선조 27)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검열·설서를 지냈으며 1597년 중시문과에 장원, 다음해
황해도 도사가 되었다. 이어 춘추관 기주관·형조정랑을 거쳐 1602년
사예·사복시정을 역임, 이어 전적·수안군수를 지낸 뒤 1606년 원 접사의
종사관이 되어 명나라 사신을 영접, 이때 탁월한 명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 후 사의원정, 삼척부사, 내자시정, 공주목사, 형조참의를
지내고, 1610년(광해 2) 진주부사로 명나라에 가서 천주교의 기도문을
얻어 왔다. 1613년 계축옥사에 평소 교의가 깊었던 서자 출신의
박응서(朴應犀)등이 처형당하자 신변의 안정을 위해 당시 권신이던
이이첨(李爾瞻)에게 아부하여
예조·호조의 참의를 지내고, 숭문원 부제조를 거쳐 1614년 천추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7년 폐모론을 주장하는 등 대북파의
일원으로 왕의 신임을 얻은 것을 기화로 반란 계획을 진행시켰다.
이해 좌참찬에 승진, 다음해 하인준(河仁俊)등과 반란을 계획하기기
탄로되어 가산이 적몰되고 처형되었다.
그의 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은
사회제도를 비판한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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