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6년(연산 2)에 진사가 되고, 1507년(중종 2)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지평 ·사성(司成)을 거쳐 도승지가 되고, 1519년 예조참판이 되었다. 이어 삼척부사로 나가 있다가 이 해 겨울에 일어난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파직당했다. 1533년 밀양부사로 복직되었으며, 경상도관찰사 ·형조참판을 거쳐 한성부판윤을 지냈으며, 1539년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춘추관지사(春秋館知事)로 세자우빈객(世子右賓客)을 겸하였다.
1545년(인종 1) 우찬성으로 의금부판사를 겸하였고, 이 해 7월 어린 명종이 즉위하자 원상(院相)에 임명되었다. 8월 을사사화(乙巳士禍)로 위사공신(衛社功臣)에 올랐으나 정순붕(鄭順朋)의 반대로 삭훈(削勳)되고, 1547년(명종 2)에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된 죄로 구례(求禮)에 유배된 후, 삭주(朔州)에 이배(移配)되어 배소에서 죽었다.
선조 초에 신원(伸寃)되고, 좌의정이 추증되었으며, 봉화(奉化)의 삼계서원(三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문집에 "충재집(冲齋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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