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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중랑장공(中郞將公)의
손자이자 정용장군(精勇將軍) 휘 덕인(德仁)의 아들이다. 일찍이
삼대(三代)로 이어지는 무장(武將)의 가문에서 태어나 문무제예(文武諸藝)를
익힌 뒤 국난(國難)에 휩쓸려 있는 고려 원종조(元宗朝)에 출사(出仕)하였다.
당시 고려는 다년간 몽고(蒙古)와의 싸움에서 국력이 쇠진(衰盡)하여
굴욕적인 화의(和議)를 수락하였고 몽주(蒙主) 세조(世祖)는 평양에
동녕부(東寧府)를 설치하여 자비령(慈悲嶺) 이북을 자국(自國)의 영토로
삼아 상국(上國)으로써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 때
원종(元宗)이 연경(燕京)에서 개경(開京)으로 돌아와 강도(江都, 강화도)에
있는 조정을 개경으로 환도(還都)할 것을 결정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삼별초(三別抄)가 원종 十一年 진도(珍島)를 근거지로 삼아 반란(叛亂)을
일으켜 그 세력이 날로 커졌다. 조정에서는 추밀부사(樞密副使)
김방경(金方慶)을 전라도(全羅道) 추토사(追討使, 토벌사령관)로 삼아
몽고의 원수(元帥) 아해(阿海)와 함께 토벌에 임하게 하였다. 여기에
부장(副將)으로 참전한 서흥군은 각종 해전(海戰)에서도 선전(善戰)하였다.
특히 난전중(亂戰中) 위기일발(危機日髮)의 상황에서 번개같은
단창(短槍)으로 적을 무찔러 추토사(追討使) 김방경을 구출(救出)하였다.(고려사
열전 기록) 또 원종(元宗) 五十0에는(1274) 원(元,
몽고의 改稱)나라 동정군(東征軍)에 고려 도독사(都督使) 김방경(金方慶)
좌군사(左軍使) 김선(金선) 우군사(右軍使) 김문비(金文庇) 등 이른바
삼익군(三翼軍)의 선봉장(線鋒將)으로 참가아였다. 이
때 함선은 九百여 척이었는데 모두 고려의 부담이었다. 연합군은
대마도(對馬島)를 침습(侵襲)하여 많은 적을 겨가하고 일기도(壹岐島)를
거쳐 구주(九州) 축전(筑前)에서 고려군은 수사분격(殊死분擊) 적을
대파하여 복시(伏屍, 엎드린 시체)가 삼을 이루어 원(元)의 도원수(都元帥)
홀돈(忽敦)을 경탄케하였다. 또 충렬왕(忠烈王) 三년(1277)
간신(奸臣) 위득유(韋得儒)와 낭장(郎將) 노진의(盧進義)의 모함으로
중찬(中贊, 수상) 김방경을 비롯하여 김흔(金흔), 조변(趙변), 의남(義男)
등 여러 부장들과 함께 서흥군도 반란의 일당으로 지목되어 문초(問招)의
마당에서 모두가 무서워서 떨고 있을 때 서흥군이 정색(正色)을 하면서
위득유, 노진의를 돌아다보며 꾸짖기를 "너희들은
개나 돼지 같은 놈들이다. 진도(珍島)를 공격할 때 너희들이 훔친 물건을
몰수하여 국가에다 바친 일이 있었는데 너희들이 이에 대한 악감(惡感)을
품고 있는 일이 뿐이다. 그런데 지금 있지도 않은 말들을
꾸며내어 대신(大臣)을 모함하고 저 하니 하늘이 만일 너희들을 죽이지
않는다면 하늘도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왕은 근거없는 고발이라 하여 모두 석방하였다.(고려사 104권
소재) 서흥군은 그 후에도 충렬왕 七년(1281)에 수행된
제二차 동정군(東征軍)에 원장(元將) 흔도(흔都), 홍다구(洪茶丘), 여장(麗將)
김방경(金方慶)의 부장(部將)으로 참가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고려조에서는 광정대부 도첨의시랑 찬성사상장군 판판도사사(匡靖大夫
都僉議侍郞 贊成事上將軍 判版圖司事)에 오르고 서흥군(瑞興君)에 봉함을
받았고 원(元)나라로부터 선수충현교위 관군총파(宣授忠顯校尉 管軍摠把)의
관직을 제수 받았다. 배위(配位)는 정부인(貞夫人)
금릉김씨이며 보문각(寶文閣) 직학사(直學士, 正四品)겸 비서윤(秘書尹,
비서실장) 김위(金褘)의 따님으로서 슬하게 아들 세구(世丘, 版圖判書)를
두었다. 서흥군에 대한 제향(祭享)은 경기도 안성 월로동에
있는 무렬사(武烈祠)에서 올리고 있고 재실로 숭모재(崇慕齋)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