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릉 김씨(金陵金氏)는
가락국(駕洛國) 구형왕(仇衡王, 구례왕이라고도 함. 가락국의 마지막
왕, 재위기간 : 521∼532)의 셋째 아들 김무득(金無得)을 시조(始祖)로
한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서기 562년(신라 진흥왕 23) 대가야(大伽倻)가
신라(新羅)의 장수(將守) 이사부(異斯夫)와 사다함(斯多含)에게 정복되어
신라와 병합되고, 진흥왕(振興王 : 신라 제 24대 왕, 재위기간 : 540∼576)이
가락국(駕洛國)에 금관소경(金官小京)을 설치하여 시조(始祖)인 무득(武得)에게
시랑(侍郞) 겸 총관(摠管)을 제수하고 금릉군(金陵君)에 봉했으므로,
그의 아들 창현(昌玄)이 본관(本貫)을 금릉(金陵)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후의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후손들은 고려(高麗)
고종(高宗 : 제 23대 왕, 재위기간 : 1214∼1260)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수사공(守司空)·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서경유수(西京留守)
등을 지내고 나라에 공(功)을 세워 태자 태사(太子太師)에 오르고 금릉군(金陵君)에
봉해진 김중구(金仲龜, 가락국 15대 무위왕의 후손)를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의 아들
김창현(金昌玄)이 금릉을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그 뒤 계보를 알 수 없어 후손인 김중구를 1세조로 삼아 대를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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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표적 인물(代表的人物) ] · 고려조(高麗朝)
김중구(仲龜) 김위(褘) : 금릉군 중구의 아들, 보문각 제학(寶文閣提學)을 지냈다.
김의(儀) : 김위(褘)의 아들, 낭장(郎將).
김석보(錫保) : 태자 태보(太子太保) 김효탁(孝鐸),
김관(琯) : 김석보(錫保)의
아들, 태자 첨사(太子詹事 : 동궁에 속한 정 3품 벼슬)에
올라 좌복야(左僕射)를 역임했다. · 조선조(朝鮮朝)
김택(澤) : 참의(參議) 김광귀(光貴)
: 김택(澤)의 아들, 양주 목사(楊州牧使)를 지냈으며,
김규(規) : 김광귀(光貴)의 아들,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한 이름난 학자(學者)로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냈으나 벼슬을 버리고 향리닌 금릉군(金陵郡) 어모면(禦侮面) 덕마동(德馬洞)에
돌아갔다가 옥천(沃川) 청신(靑山)의 청량산(淸凉山)으로 이거(移居)하여
성리학(性理學) 연구에 일생을 바쳤다. 김각(珏)
: 김규(規)의 아들,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功)을 세워 정국원종이등공신(靖國原從二等功臣)에
책록하고 덕산 현감(德山縣監)을 지냈다. 김맹지(孟智)
: 현감(縣監) 김철성(哲成) : 김맹지의
아들, 이조 참판(吏曹參判)
김원석(元錫)은 빈곤한 가세(家勢)에도 부모(父母) 봉양이 지극하여 효행(孝行)으로
이름을 떨쳤다. 김장(樟) : 교위 홍선의 아들,
학자(學者)로 유명했는데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인(門人)으로 학문이 뛰어나 「훈몽서지행방편(訓蒙書知行方編)」을
저술했다. 김상원(相元) :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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