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8년(선조 11) 무과에 급제, 훈련원 판관이
되었을 때 군사에 관한 일을 병조판서에게 건의한 것이 채택되지 않아
관직을 벼렸다. 1591년 진주판관(晋州判官)이 되고
다음해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을
때 죽은 목사를 대신하여 성지를 수축하고 무기를 갖추어 목사로 승진되었다.
이어 사천(泗川), 고성(固城), 진해(鎭海) 등지에서 적을 격파하고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에
올라 금산(金山)에서 다시 적을 격파, 이 해 10월 적의 대군이 진주성(晋州城)을 포위하자
불과 3천8백의 병력으로 7일간의 공방전을 벌여 3만여의 사상자를 내게
하고 적을 격퇴했으나 이 싸움에서 이마에 적탄을 맞고 전사했다.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추록되고, 상락군(上洛君)에 추봉되었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봉, 진주(晋州)의 충민사(忠愍祠)에 배향(配享)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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