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4년(공민왕 23)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덕녕부주부(德寧府注簿)가 되었다.
우왕 때 왜적 격퇴의 전공으로 포상을 받은 조민수(曺敏修)의 사은 편지에 대해 회교(回敎)를 작성하라는 왕명을 받고, 이를 거절한 죄로 돌산(突山)에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 전교부령(典校副令)·사재시판사(司宰寺判事)에 이르고,
공양왕 때 대사성·세자좌보덕(世子左輔德)이 되었다.
숭불(崇佛)의 폐해를 지적하고 연복사탑(演福寺塔)의 중수공사 중지를 상소하였다.
뒤에 전교시판사(典校寺判事)·좌상시(左常侍)·형조판서에 이르렀으나, 정세가 어지러워지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에 돌아가 은거하였다.
조선 개국 후 태종 때 형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고려가 망한 것을 비관하여 자결하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