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호 진찬의 증손, 호조참판 강세황의 천고로 도화서 화원이
된 뒤에 1771년 왕세손의 얼굴을 그렸고, 1781년 어진화사로 정조를
그렸으며, 1795년 신창 현감이 되었다가 곧 사임했다. 이듬해 왕명으로
용주사의 부모은중령삽화ㆍ판화를 그렸다. 김응한에게 그림을 배웠으나
강렬한 개성으로 독특한 경지를 개척, 한국적인 풍토감각을 맑게 표현했다.
풍속화에 있어서는 해학과 풍자를 조화하여 서민적인 풍치로 그렸고,
용주사의 [삼세여래후불행화]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운염기법을 구사하고
채색의 농담으로 형체의 원근고저를 표현한 작품이다. 당시 화단에 고착된
무력한 중국 북화양식을 할때, 대담하게 남화양식을 시도하여 신조한
조형미를 완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