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8년(선조 21) 진사가 되고, 이듬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내외직을 거쳐,
임진왜란 때에는 연안(延安)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조달하였으며,
1594년 군공청의 도청(都廳)이 되어 공을 세웠다.
그 뒤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광해군 때 군기시정(軍器寺正)을 지냈다.
1617년 이항복(李恒福)과 함께 인목대비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남해에 유배되고, 명천 ·온성(穩城) ·사천 등지에 이배(移配)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대사성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끝난 뒤 여주목사 ·춘천부사 등을 지내고,
1636년 청백리에 녹선되고 대사헌에 올랐다.
사천의 구계서원(龜溪書院), 온성의 충곡서원(忠谷書院), 안주의 청천사(淸川祠)에 배향되었다.
문집에는 '성옹유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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