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rning: main(../../uni2head.php) [function.main]: failed to open stream: No such file or directory in /home/surname/gim/db/bang_gyeong.html on line 2

Warning: main(../../uni2head.php) [function.main]: failed to open stream: No such file or directory in /home/surname/gim/db/bang_gyeong.html on line 2

Warning: main() [function.include]: Failed opening '../../uni2head.php' for inclusion (include_path='.:/usr/local/lib/php') in /home/surname/gim/db/bang_gyeong.html on line 2
:+: Surname.info :+: 김방경(金方慶) - 구 안동김씨(舊 安東金氏)

 

 김방경 (金方慶)

 [ 1212년(강종 1) ∼ 1300년(충렬왕 26) ]


  고려 명장·정치가
  자는 본연(本然),
  시호는 충렬(忠烈).


  신라 경순왕의 후손,
  한림학사 김효인(孝印)의 아들이다.

  고종 때 음보(蔭補)로 16세에 산원(散員)이 되어 식목녹사(式目錄事)를 겸하고, 감찰어사를 거쳐 서북면 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에 이르렀다.
  이때에 몽고병의 침입으로 주민들과 함께 위도(葦島)에 들어가 저수지를 만들고 제방을 쌓는 등 농토를 개간, 농사를 짓게 했다.
  1263년(원종 3)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에 승진, 뒤에 상장군으로 남경 유수에 좌천되었으나 전에 서북면 병마사로 있을대 선정을 베풀었기 때문에, 서북 여러 성에서 진정이 있어 다시 서북면 병마사가 되었다.
  형부상서, 추밀언 부사를 거쳐
  1269년(원종 10)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 있을 때, 임연(林衍)이 원종을 폐하고 안경공 창을 세우자 원나라 황제 세조가 보낸 맹격도의 2천군사와 함께 임연을 치려고 동경에 이르렀으나, 왕이 복위된 것을 알고 다시 북경으로 돌아갔다.
  1270년에 장군 배중손(裵仲孫)등이 승화후(承化侯) 온(溫)을 왕으로 추대하고 삼별초(三別抄)를 이끌어 난을 일으켜 진도로 들어가 연안을 침범하자
  이듬해 몽고의 장군 혼도( 都)ㆍ홍다구(洪茶丘)등과 함께 진도를 함락시키고 수태위ㆍ중서시랑평장사가 되었다.
  적장 김통정(金通精) 등이 남은 무리들을 이끌고 탐라에 들어가서 성곽을 쌓고 항거하자,
  1273년(원종 14) 행영중군병마원수(行營中軍兵馬元帥)로서 원나라 장군 혼도ㆍ홍다구(洪茶丘)와 함께 또다시 원나라에 들어가 삼별초를 쳐서 이를 완전히 평정했다.
  그후 시중(侍中)이 되고 원나라에 들어가 세조로부터 금안등을 하사받고, 돌아와서 개부의동삼사의 작위를 더 받았다.
  1274년 충렬왕이 즉위하자 원나라에서 합포(合浦, 馬山)에 정동행성을 두고,
  일본을 정벌할 때 중군장으로 출정, 2만 5천명의 여원 연합군과 함께 쓰시마섬[對馬島]를 친 다음 본토로 향하는 도중 풍랑으로 패하고 돌아왔다.
  1278년 앞서의 일본 정벌중에 좌군수 김신이 익사할 때 이를 구하지 않았던 부사 위득유(韋得濡)를 파면하게 되고, 전라도 전도(珍島)의 삼별초(三別抄)를 공략할 때 전투를 소흘히 하고 재산을 약탈한 낭장 노진의(盧進義)의 가간을 몰수케 한 것이 원인이 되어, 이들로부터 국왕과 원나라 공주 및 다루가치를 제거하고 강도에 들어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무고를 받았다.
  이에 혼도(忻都)ㆍ홍다구(洪茶丘)로부터 혹독한 고문을 받고 나서 청도로 귀양갔다가 충렬왕의 변호로 석방되었다.
  1281년(충렬왕 7) 원나라가 받고 나서 청도로 귀양갔다가 충렬왕의 변호로 석방되었다.
  1281년(충렬왕 7) 원나라가 다시 일본 정벌을 할 때 고려군 도원수로서 종군, 일본 이끼도(壹岐島)를 거쳐 하까다에 이르러 승리를 거두었으나 태풍과 적의 기습을 당하여 참패하고 돌아와서, 벼슬을 사양하고 추충정난정원공신(推忠靖亂定遠功臣)에 삼중대광, 첨의중찬, 판전리사사, 세자사로서 치사하고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에 봉해졌다.
  충직하고 근검했으나 부하 장병들의 민폐를 막지 못한 것과 일본 정벌 후의 불공평한 논공행상(論功行賞) 등으로 상하 민심을 잃어, 죽어서 예장(禮葬)을 치르지 못하고 고향 안동에서 장례를 지냈다.

  충선왕 때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에 추서되었다.

 

 

 구 안동김씨(舊 安東金氏)


Warning: main(../../uni2foot.php) [function.main]: failed to open stream: No such file or directory in /home/surname/gim/db/bang_gyeong.html on line 73

Warning: main(../../uni2foot.php) [function.main]: failed to open stream: No such file or directory in /home/surname/gim/db/bang_gyeong.html on line 73

Warning: main() [function.include]: Failed opening '../../uni2foot.php' for inclusion (include_path='.:/usr/local/lib/php') in /home/surname/gim/db/bang_gyeong.html on line 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