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2년(선조 15) 성균관에 입학, 1590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호당에 들어 사가독서를 한 후, 겸열이 되었다.
정언을 거쳐 1597년 호조참판으로 진하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1600년 부제학에 승진, 이듬해 앞서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1589년)에
연루된 혐의로 1590년 원사한 최영경(崔永慶)을 신원케 하고, 이어 당시
그 옥사를 다스린 서인들을 탄핵하여 실각케 했다. 공조·이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604년 대사헌을 거쳐 좌의정에 승진했다. 이
때 영창대군을 후계자로 삼는 것을 극력 반대했고, 1613년(광해 5)
계축옥사로 극형을 받게 된 정온(鄭蘊)을 유배에 그치게 했으며,
이듬해
영의정에 발탁, 1617년(광해 9) 폐모론을 반대하여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와
은거했다. 1620년 광해군의 특지로 덕평부원군(德平府院君)에
봉해지고 영중추부사가 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모의 때 참여하지 않았고,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내응하리라는 혐의로 사사되었다. 후에 이원익(李元翼), 이귀(李貴)
등의 상소로 복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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