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벌도리(蘇伐都利)를 원조(元祖)로 하고 있으며, 고려조(高麗朝)의 학자 최충(崔沖)의 후손으로 전언(傳言)하나
문전(文典)의 망실(亡失)로 정확한 상계보(上系譜)는 밝히기 어려우며, 시조(始祖)가 황해도(黃海道) 연안(延安)에
거주하며 벼슬에 봉해진 뒤, 연안(延安)을 본관(本貫)으로 세계(世系)를 이루어 가승보(家承譜)가 전하여 내려오고
있다.
이세(二世) 최도업(道業, 諱 業吉, 字 先甫)은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지냈고,
삼세(三世) 최영흥(永興, 諱 時萬, 字 時奉)은 관 절충장군 행룡양위부호군(官 折衝將軍 行龍?衛副護軍)을 지냈으며,
사세(四世) 최규동(圭東, 諱 大奉, 字 大寧)도 관 통정대부 절충장군 행룡양위부호군 (官 通政大夫 折衝將軍 行龍讓衛副護軍)을 지냈고,
오세(五世) 최윤복(允福)은 가선대부 절충장군 행룡양위부장군(嘉善大夫 折衝將軍 行龍讓衛副護軍)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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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성촌(集姓村) ] 전언(傳言)에 의하면 후대(後代) 선조(先祖) 중 한 분이 부여(扶餘) 홍산현(鴻山縣)의 벼슬로 부임한 뒤, 홍산(鴻山)에 거주(居住)하다가, 구한말(舊韓末) 천주교(天主敎) 박해(迫害) 등 여러 환란(患亂)을 피해 흩어져 살게 되었다. 후손(後孫)은 흔하지 않아 현재 부여(扶餘)에 4가구, 대전(大田)에 4가구 서울에 2가구, 수원(水原)에 5가구, 울산(蔚山)에 1가구 등이 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