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씨의 대종(大宗)인 경주
최씨(慶州崔氏)에서
분적(分籍)된 계통(系統)으로 알려졌으나 성관(姓貫) 연혁에 대해서는 미상(未詳)하다.
"밀양최씨계해보(密陽崔氏癸亥譜)"에 의하면 밀양최씨는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 경주최씨의 시조)의 후손인 화숙공(和淑公) 최현우의 15세손으로 기록된 최익대(益大)가 조선 숙종(肅宗) 때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용양위부호군(龍 衛副護軍)을 지냈으며, 경종(景宗)이 즉위한 후 몸이 병약하고 후사(後嗣)가 없었으므로 왕세제(王世弟)
연잉군(延 君, 후에 영조가 됨)을 책봉하고 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하다가 소론(小論)으로부터 탄핵을 받았던 노론(老論)의 영수 김창집(金昌集,
당시
영의정)이 화를 입었던 사건에 연루되어 각처(各處)에 은거(隱居)하였다가 경기도 수리산에 들어가 변관명(變貫名)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사실(事實)을 고증할 문헌이 없다. 그 후 최익대(益大)는 영조(英祖)가 즉위하자 사면(赦免)되었고, 그의 후손들이 전국에
산거(散居)하면서 3세손 최경륜(景崙)이 한성성적(漢城成籍)에 본관(本貫)을 밀양(密陽)으로 기록한 연유로 해서 최익대(益大)를 일세조(一世祖) 로
하고 밀양을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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