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길(崔鳴吉)의 아들이다.
남구만(南九萬) ·박세채(朴世采)의 문인.
1671년(현종 1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친 뒤에 이조참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이조판서를 지냈다.
1697년(숙종 23) 우의정에, 1699년 좌의정과 홍문관 대제학(大提學)을 겸직, "국조보감(國朝寶鑑)"의 속편과 "여지승람(輿地勝覽)" 증보 ·편찬을 지도했다.
1701년(숙종 27) 영의정으로 장희빈(張禧嬪)의 처형을 반대하다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났다.
소론(少論)의 영수로 많은 파란을 겪으면서도 8번이나 영의정을 지냈으며, 당시 배척받던 양명학(陽明學)을 발전시켰다.
글씨와 문장에도 뛰어났으며, 저서에 "경세정운도설(經世正韻圖說)",
"명곡집 (明谷集)"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