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1년(명종 16) 식년문과에 장원하고, 여러
내외직을 지낸 뒤 1577년(선조 10) 주청사의 질정 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81년 재령군수로 기민을 구제하는데 힘써 표리를 하사받았으며,
1584년
호군으로 이문정시에 장원하고, 1592년 공주목사, 이듬해 전주부윤을
거쳐 승문원 제조를 지냈다. 1594년 주청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그 후 판결사, 동지중추 부사, 강릉부사 등을 거쳐 형조참판에
이르러 사직하고 평양에 은거했다. 임진왜란 때 외교 문서 작성에
제 1인자였으며, 여러 번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그곳 학자들로부터
명문장가 라는 격찬을 받았다. 시에도 뛰어났다.
그의 문장(글)과
차천로(車天輅)의 시,
한호(韓濩, 한석봉)의 글씨를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일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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