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과에 급제하여 성균학관·예문춘추검열·장흥고사(長興庫使) 등을 지내고
1320년(충숙왕
7) 원(元)나라 과거에 급제하여 요양로개주판관(遼陽路蓋州判官)이 되었다가 병을 핑계로 귀국, 예문응교(藝文應敎)·검교(檢校)·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총명하여 어려서부터 시를 지었고, 이제현(李齋賢)·민사평(閔思平) 등과 사귀며 시작(詩作) 및 저술에 힘썼다.
강직하고 선악이 분명한
성품으로 윗사람의 미움을 받아 처세에 기복이 많았다.
저서로는 자서전 "예산은자전(猊山隱者傳)"과 문집 "졸고천백(拙藁千百)"
및 고려 명현의 시문을 25권에 모은 '동인지문(東人之文)'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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