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상하(權尙夏)의 문인(門人).
첨지중추부사 채영용의 아들이다.
1716년(숙종
42)
학행으로 천거되어 왕자사부(師傅)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1721년(경종
1)
세자시강원자의(世子侍講院諮議)가 되었으나 역시 취임하자 않았다.
신임사화(辛壬士禍)로 노론이 실각하자 소론(少論)의 죄를 논척(論斥)
상소하고 구운산(九雲山)에 은거했으며, 1725년(영조 1) 부솔, 경연관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했다가 그 후 마지못해 부여현감, 형조좌랑(刑曹佐郞),
공홍도 도사를 잠시 지냈다. 사퇴 후 한원진(韓元震) ·윤봉구(尹鳳九)
·이간(李柬) 등과 교유하면서 지냈다.
조선 후기 성리학의 대가로서
당시 심성론(心性論)으로 유학계(儒學界)가 호론(湖論)·낙론(洛論)으로
갈리어 논쟁을 벌일 때 한원진(韓元震)과 함께 호론에 속했다. 역사
·지리 ·천문 ·상수(象數) 등에도 박통하였다.
저서로는
봉암집(鳳巖集), 성리관규(性理管竅), 세심요결(洗心要訣), 독서전보(讀書塡補),
천문집(天文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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