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추부사 채응일(膺一)의 아들이다.
오광운(吳光運)과
강박(姜樸)에게 배웠다.
1735년(영조 11) 15세에 향시에 급제한 후
1743년(영조 19)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정자를 거쳐 수찬·교리를 지냈다. 1748년 영조의 특명에 의해 탕평책의 제도적 장치인 한림회권(翰林會圈)에
뽑혀 예문관 사관이 됨으로써 정통 관료로 성장하였다. 1751년에는 중인(中人)의 묘소를 빼앗았다 하여 삼척에 유배되기도
하였으나, 1753년
균역법 운영상황을 조사하는 충청도(호서)암행어사가 되었고, 1755년에
나주괘서사건을 조사하는 문사랑(問査郞)으로 활동하였고 부승지 ·이천부사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1758년 도승지가 되었는데, 사도세자를 미워한 영조가 세자를
폐위하는 명령을 내리자 죽음을 무릅쓰고 건의하여 철회시켰다('열성지장(列聖誌狀)'의
편찬에 참여).
그 후 대사헌 ·예문관과 홍문관의 제학 등 언론과 학문의
관직, 경기감사 ·개성유수 ·안악군수 ·함경감사 ·한성판윤 등의
지역 행정직, 비변사당상과 병조 ·예조 ·호조의 판서 등 중앙 정치
·행정직을 두루 역임하는 한편 1771년에는 동지사로 중국에도 다녀온
후, 1772년부터는 세손우빈객으로 세손의 교육에 참여하고, 공시당상(貢市堂上)으로
경제활동을 관할하였다.
이후 호조판서 ·좌참찬을 지냈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형조판서 겸 의금부판사로서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여한 자들을 처단하는 일을 처리한 후, 공노비의 폐단을 바로잡는
절목을 마련하는 등 국왕의 정책을 보필하였다.
규장각제학 ·예문관제학 ·한성판윤 ·강화유수를
역임하였으나 1780년(정조 4) 홍국영(洪國榮)이 실각할 때 그와 친하고
사도세자의 신원을 주장하여 선왕의 정책을 부정했다는 등의 공격을
받아 이후 서울 근교 명덕산에서 8년간 은거생활을 하였다.
1788년 정조의 특명에 의해 우의정이 되었으며 2년 후 좌의정으로
승진하면서 3년간 혼자 정승을 맡아 국정을 운영하였다.
1793년에 한때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나 그 후로는 주로 수원성
축성을 담당하였다.
죽은 뒤 1801년(순조 1)에 노론
벽파(僻派)에 의해 추탈관작되었다가 1823년에 영남인들의 요청이 받아들여져
신원되었다.
영조대에 활동한 스승 오광운을 이은 남인, 특히 청남(淸南)
계열의 지도자로서 사도세자를 신원하여야 한다는 등 자기 정파의 주장을
충실히 지키면서 정조의 탕평책을 추진한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그것은 목숨을 걸고 사도세자를 보호한 일이 계기가 되어,
영조가 사도세자의 죽음을 후회하여 기록한 '금등(金)'을 정조와
함께 보관할 유일한 신하로 채택될 만큼 두 국왕의 깊은 신임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노론 출신으로 정조의 탕평책을 지지한 김종수(金鍾秀)
·윤시동(尹蓍東)의 상대역이라 할 수 있다.
사도세자 문제에 대한 입장을 기준으로 정파를 나누면 시파(時派)로
분류된다.
전반적인 사상이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음은 물론이지만,
당시의 주도세력인 서인 ·노론과는 여러 면에서 대비되는 주장을 하였다.
정치체제는 노론들이 남송(南宋)을 내세웠던 것에 비해
강력한 왕권에 의한 통일국가를 유지한 전한(前漢)을 모범으로 하였다.
천주교 ·불교 등을 이단으로 배격하였으나 정조와 마찬가지로
그것을 믿는 사람들을 제거하기보다는 교화의 대상으로 삼았다.
정조 중반 이후 여러 차례 처벌받고, 죽은 뒤 관작을 뺏긴
데는 천주교를 두둔했다는 것이 큰 구실이 되었다.
당시의 사회 모순들을 깊이 인식했으나 제도의 개혁보다는
운영을 통해 해결하려 하였다.
상업보다 농업을 강조하였으며 1791년에 대상인의 특권을
폐지하고 소상인의 활동 자유를 늘리는 조치인 신해통공(辛亥通共)을
주도하였다.
한편, 사족 우위 및 적서(嫡庶) 구별을 엄히 함으로써 사회
안정을 꾀하려는 보수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정치적 입장은 이가환(李家煥) ·정약용(丁若鏞) 등으로
이어졌으며, 사후에도 남인들 사이에 확고한 권위가 유지되어 19세기
순조 연간 세도정치 아래에서 남인들의 정치적 발언은 그를 신원해야
한다는 내용을 중심으로 하였다.
문집으로 '번암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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