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1년(연산군7) 진사로 문과에 급제, 전라도사
재임시 연산군의 폐희(嬖姬)의 아버지 우부리를 장살, 대죄했으나 중종반정으로
무사했다. 사간원 헌납 재임시 종친의월자승당을 반대하여 한산군수로
좌천 되었다가 그 후 홍문관 교리를 거쳐 호당에 뽑혔다. 응교를
거쳐 담양 부사 재임시 순창군수 김정(金淨)과 중종반정 후 폐위된 단경왕후
신씨의 복위와 반정훈신의 추죄를 상소, 권신의 격렬한 반발로 남평에
유배되었다. 풀려난 후 여러 고을의 목사를 지내고
1526년 문과중시에
장원, 나주목사로 있다가 병으로 낙향했다. 평생을 직절강명으로
일관, 귄귀의 배척을 받았으나 기묘사화 때에는 복상중이라서 참화를
면하고 피화자들을 구휼했다.
시문에 뛰어났고, 청백리에 녹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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