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긍한의 아들.
1723년(경종 3) 증광문과에 급제, 사관을 거쳐 병조정랑이
되고, 1724년(영조 1) 노론집권으로 삭직되었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사서에 등용, 영남 암행어사를 거쳐 다음해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오명항(吳命恒)의 종사관으로 전공을 세우고 경상도 관찰사에 발착,
분무공신 2등으로 영성군에 봉해졌다. 1730년 참찬관에 이어호서어사로서
기민을 구제, 1734년 진주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 호조참판이 되었다.
1737년 병조판서를 거쳐 다음해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1741년
함경도 진휼사로 경상도 곡식 1만 석을 실어다 기민을 구제, 송덕비가
세워졌다. 다음해 병조판서, 1743년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 다음해 황해도 수군절도사로 좌천되었다. 그 후 영남 균세사,
지성균관사, 판의금부사, 세손사부 등을 역임, 1752년 왕세손이 죽자
약방제조의 책임을 추궁당해 제주에 안치됐으나 다음해 풀려나와 우참찬에
올랐다. 군정과 세정에 밝았으며, 암행어사 시절의 많은 일화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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