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시재가 있어 13세때 상경하여 양응남(梁應南),
노수신(盧守愼) 등에게 사사했다.
1564년(명종 19)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산수를 즐기며 시서에 열중했다.
1572년(선조
5) 명나라 사신이 오자 노수신(盧守愼)을 따라 백의로 제술관이 되어 사신을 감탄게 했다.
1577년
처음으로 선릉참봉으로 관직에 나갔으며 이어 정릉, 예빈시, 소격서의
참봉을 지냈다. 당시의 최경창(崔慶昌), 이달(李達)과 함께 조선에서
처음으로 성당의 시풍에 들어갔다 하여 삼당으로 불렀다.
글씨에
뛰어났다. 강진의 서봉서원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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